제 1부 타이완(대만)의 어제와 오늘

기사입력 2014.01.0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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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 24일 베이징(北京)에서 ‘한중수교협정’에 서명했다. 동시에 타이완(대만)은 서울 명동에 위치한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2,000 여명의 화교.직원들이 슬픔에 잠긴채 타이완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내려 놓는 하기식을 거행해야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14년 새해, 월드얀뉴스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타이완과 중국간에 일고 있는 화해분위기를 고찰함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짓는데 매우 중요한 남북관계 문제의 접근법을 찾고자 한다. 또한 타이완과 우리나라 양국민의 이해증진을 위해 그들의 변모된 생활상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타이완의 역사

타이완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말기인 1만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7천년 전부터 약 4백년 전까지 남도언어계통원주민의 선조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오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3세기 중엽 한족이 타이완 섬을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중국의 기록문헌 '임해수토지'는 전하고 있다. 7세기 초 수나라 시대부터 한족은 남쪽에 위치한 타이완 섬에 많은 관심을 갖고, 1360년 원나라는 평후섬에 처음으로 순검사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서구 열강들이 지구촌에 식민지를 건설해 나가고 무역활동을 할 무렵, 동아시아지역 대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타이완은 동북아해역과 동남아 해역의 교차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양 열강들의 격전지가 되었다.

타이완 다부족 역사의 발단은 1624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지금의 타이난 지역인 안핑(安平)에 제란디아성을 구축하여 거점을 확보하고 타이완에서 포교와 무역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또한 토지 개간의 필요성에 따라 동인도회사가 중국 푸젠성의 한족들을 끌어들이면서 점차 한족사회가 형성되었다.

1626년 스페인이 타이완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식민지 정부 수립을 준비해 나갈 때, 네덜란드는 이 지역을 장악하여 스페인을 몰아냈고, 164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면서 네덜란드의 타이완 통치시대가 펼쳐졌다.

   

만주족이 1644년 명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중국 푸젠성(福建省) 남부, 광둥성(廣東省) 동부 지역의 많은 중국인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던 정성공(鄭成功, Koxinga)은 1662년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타이완 내에 한족정권을 수립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항했다.

청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1683년 6월 타이완 정복에 나서 1년 후인 1684년,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 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후 중국 본토로부터 이민이 증가하면서 1885년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한다.

   

그 후 우리나라(당시 조선)의 주권을 놓고 청과 일본이 붙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일본에 패하게 된다. 중국은 일본의 시모노세키라는 지역에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213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난 타이완은 일본에 할양(割讓)된다. 이로써 타이완은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약 50여 년간 일본의 식민지하에 놓이게 되었다.

   
타이완 총독부 청사


대만의 국부 장제스 전 총통 그리고 국립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1927년 장재스(장개석)는 상하이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고, 다음 해에 베이징을 점령했다. 1930년 이후에는 5회에 걸쳐 대규모 중국공산당 포위 전을 펼쳤다. 하지만 '내전(內戰)정지, 일치항일(抗日)을 부르짖는 국민들의 여론이 비등해 지면서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국민당의 장재스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다시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1949년 12월 장제스 정권은 중국공산당인 마오쩌둥의 홍군에 패배하면서 타이완 섬으로 퇴각해야 했다.

그로부터 타이완은 38년이란 계엄령 속으로 빠져들었다. 현재도 타이완은 유사시 중국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 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 본토 역시 수천 개의 미사일을 타이완 방향으로 실전 배치해 놓고 있다.

   

1975년 중화민국의 국부 장제스 총통이 서거하자 타이완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 총통의 본명인 중정(中正)을 건물의 이름에 넣어 1980년 3월 국립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을 완공했다.

   

국립중정기념당의 정문인 자유광장을 지나서 89개의 계단(장개석 총통이 89세에 서거한 것을 의미)을 오르면 기념당 2층에는 전면이 트인 대형 홀이 있다. 이곳에는 높이 6.3m, 무게 25톤의 거대한 장개석 총통 청동상이 온화한 미소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장개석 총통 청동상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2007년 5월 천수이볜 정부는 이곳을 국립타이완민주기념당으로 개명했다. 이후 2008년 5월 마잉주 총통이 당선되면서 국립중정기념당으로 복원됐다. 이곳에는 양 옆으로 국가희극원과 국가음악청이 함께 있다.

2008년 국민당 마잉주는 통일하지 않고 독립하지 않고 무력도 쓰지 않는다는 3불(不)정책으로 국민들의 신임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마잉주의 당선은 8년간의 민진당 천수이벤의 반중국 집권정치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10여 년 간 유지돼왔던 냉전체제는 중국 대만 간의 상주 대표부 설치 등으로 활발히 교류하며 함께 발전하고 있다. 비록 정치는 사회주의 체제지만 시장경제를 도입해 평화와 안정이 절실히 필요한 중국과 타이완의 이해는 절충점을 찾아 가고 있다.

   

두 나라 서로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타이완과 중국은 2010년 국가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처럼 상품의 관세를 없애고 투자를 보장하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맺었다. 이 협정은 개발도상국가에 쫓기고,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암울한 대만 경제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2013년, 타이완 국민들은 대선에서 마잉주 총통의 유연한 대중(對中) 정책에 호응하며 현명하게도 그를 선택했다.

   

타이완은 중국 본토에 의한 강제흡수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양국에는 수많은 직항로가 개설돼있어 오늘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1949년 이래 타이베이는 국민정부에 의해 임시수도로 지정되었다. 타이완은 동쪽의 태평양, 서쪽의 타이완(포르모사)해협, 남쪽의 바시해협, 북쪽의 동중국해와 닿아 있고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1/3크기로 총인구 2300만 명 중 한족의 비율은 98%를 차지한다.

   
상대방을 배려한, 바깥쪽으로도 서랍과 의자가 놓여있는 장재스 총통의 책상

장재스 총통의 책상은 바깥쪽으로도 서랍과 의자가 놓여있다. 이것은 권력을 내려 놓듯,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서, 사후(死後)에도 그는 타이완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양 옆으로 있는 국가희극원과 국가음악청

[최화순 기자 hschoi@worldy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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